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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한국 성씨 족보 가문 이야기이지용(1870년∼1928년)
  • 다산저널
  • 승인 2018.03.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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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李址鎔) 초명은 이은용 자는 경천 호는 향운 문관이며 정치가로 친일 반민
족행위자로 187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며 고종 황제의 5촌 조카로 아버지는 완영군 이재긍이다.

1887년 12월 18살 때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규장각 대교를 시작으로 시강원 문학, 형조참의,돈령도정등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95년 4월 왕태자비 궁 대부를 지내고 그해 7월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종척집사가 되었다.

1896년 8월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부터 1897년 2월 25일까지 고종 황제와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때 비서원승을 지내고 10월 왕태자궁 부첨사를 지냈다.
1897년 4월 시강원 첨사 1898년 6월 황해도관찰사 겸 황해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하고 1899년 8월 경상남도 관찰사 겸 경상남도 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900년 9월 궁내부협판 겸 규장각 직학사를 겸임하고 1901년 1월 궁내부대신 서리로 일본 특명전권대사를 겸임하고 그해 5월 군부대신 임시 서리를 맡으면서 육군참장과 태의원경을 겸임했다.
한 달 후 6월 다시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가 되고 진연청 당상 겸 상의사 제조를 겸임하고 7월 군부대신 임시 서리를 지냈다.
9월 원수부 기록국 총장 임시 서리 겸 헌병 사령관 겸 혜민원 의정관 등을 겸했다. 1902년 1월 경부대신 임시 서리로 전임하고 2월 혜민원 총재 4월 전선사제조 겸 수륜원 총재 겸 기로소 비서장을 지내고 7월 법부대신 임시 서리 겸 교방사 제조를 겸하고 1903년 10월 일본국 특명전권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부터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본 밴드 임권조를 검색해보세요.)가 추진하는 한일 밀약에 앞장서고 12월 외부대신 임시 서리를 지냈다.
1904년 1월 종척집사 겸 의정부 찬정 겸 헌병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하야시 곤스케와 을미사변(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 망명자 문제를 처리하고 사레비 1만 원을 받았다.
그 해 2월 법부대신 겸 헌병 사령관 임시 서리 겸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2월 23일 이지용은 외부대신 서리로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한일의정서에 조인하고 그해 3월 국민들의 비난이 높아지자 일본 대사로 일본으로 갔다.
4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의정서에 조인한 공로로 훈 1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공사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한규설, 법부대신 이하영,탁지부대신 민영기,군부대신 이근택,학부대신 이완용,내부대신 이지용,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놓고 2차 한일의정서(을사조약)에 서명을 독촉했으나 한규설,이하영,민영기는 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하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박제순, 권중현 등은 찬성 의사를 밝히자 한규설은 격분해서 쓰러졌다. 그러나 오후 3시가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날 국민들은 서울시내 여러 곳에서 시위를 하자 일본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을 시내의 요소요소와 궁궐 안팎으로 배치하였다.
오후 늦게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궁중에서 어전회의가 열리고 어전회의에서 2차 한일협약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일군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고종을 배알하고 2차 한일협약을 체결할 것을 재촉하자 고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밤이 늦어도 체결되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박제순· 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을 모아놓고 다시 회의를 열어 2차 한일협약을 승인받았다.
조약이 체결되자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은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청국, 독일,벨기에 등은 대한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906년 8월 대한식산장려회 총재 10월부터 적십자사 총재 임시 서리 12월 특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1909년 6월 일본 천황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는 신궁봉경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총부의장으로 일본 신궁 건축의 발문을 짓고 7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황태자 기념장을 받았다.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가 주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 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그 후 매년 16,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다. 당시 도성에 주택 한 채 가격이 1만 원 정도였다.
1912년 1월 도박을 하다가 검거되고 태형 100대를 선고받고 모든 관직과 회원에서 해임되고 귀족 예우도 정지되었다.

1915년 9월 특사로 감형되고 백작 작위를 회복한 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식에 참석하고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 6월 매년 30,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8년 그가 죽은 후 일본 정부는 정 3위에 추서했다. 작위는 후손에게 습작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195인 명단에 기록되고 그의 재산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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