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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한국 성씨 족보 가문 이야기공주 김 씨
  • 다산저널
  • 승인 2018.03.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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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김 씨 시조 김의손(金義孫)은 경순왕의 8세손 김지대(청도 김 씨 시조의 9세손)로 조선 세종 때 형조판서와 돈령부사를 지낸 김점의 둘째 아들이다.
김의손은 어려서 사마시에 합격하고 참판을 거쳐서 여러 관직을 지내고 공주백에 봉해지자 아들 여덟 명 중에 다섯 아들은 청도김 씨를 이어가고 세 아들은 청도김 씨에서 분파하여 공주김 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의손의 넷째 아들 김용은 공주파 다섯째 아들 김구는 평양파 여섯째 아들 김타는 곽산파의 시조가 되었다.

김학기는 세조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이조정랑과 집의를 거쳐서 대제학을 지내고 김학기의 동생 김학익은 현감을 지냈다.
김천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능한산성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
김덕량은 1546년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과 군수를 지내고 부호군 김언충은 군자감을 김덕택은 감찰을 지냈다.
김정식(金廷湜)은 그의 호 소월(素月)로 더 잘 알려진 일제 강점기의 시인으로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나고 어려서 평안북도 곽산군으로 이사하고 얼마 후 아버지 김성도를 여의고 광산 사업을 하던 할아버지 손에 성장했다.

 

그 후 곽산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에서 서춘,이돈화,안서,김억등 스승에게 교육을 받고 특히 스승 김억에게 시를 배웠다.
1916년 오산학교를 다닐 때 구성군 평지면에 살던 풍산 홍 씨 홍단실과 결혼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 오산학교가 잠시 폐교되자 배재고등 보통학교에 편입하고 졸업했다.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고 그해 9월 간토 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하고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지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고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였으나 실패하고 빈곤에 시달렸다.
1934년 12월 24일 33살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셨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 1등급이 추서되고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도서관 옆에 시비가 세워지고 그 후 왕십리에 그의 시 왕십리의 시비가 세워졌다.

먼 후일 (1920년 발표)/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공주 김 씨 조선시대 때 과거 급제자는 문과 9명, 무과 5명, 사마시 16명, 율과 1명 등 모두 31명이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공주 김 씨는 7,58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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