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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는 오렌지 한 개가 무섭고 두렵다.
  • 박혜범 섬진강 정신문화원장
  • 승인 2018.07.1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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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리가 무얼 수입하여 먹고 있는 거지?
지난 봄날, 그러니까 붉은 홍매가 만개하던 3월 어느 날, 아름다운 미인이 섬진강을 지나는 길에 전해주고 간 오렌지 한 봉지를, 늙은 촌부를 생각해 주는 그녀의 마음에 감사하며, 싱크대를 오가는 부엌을 창가에 놓아두었는데, 지금 불덩이 같은 여름 햇볕이 쏟아지고 있는 삼복(三伏)의 창가에 한 개가 남아있다.

봄날 강변의 꽃향기로 지나간 아름다운 미인이 선물로 주고 간 오렌지를, 오며 가며 다 주워 먹고 딱 한 개가 지금껏 부엌 창가에 남아있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마지막 한 개가 남은 것이 아쉬워서 아껴두었던 것인데, 그런 내 마음속에서 4월이 지나가버렸고, 5월 어느 날 더는 썩어서 먹지 못할 거라 짐작하고, 처음 놓아둔 그 자리 창가에 그대로 놓아두고 여태 잊고 산 것이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사달이 나도 큰 사달이 났다.
귀인이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집안 가득 배다 못해 절어버린 늙은 홀아비 냄새를 없애기 위해, 창문을 열어놓고 환기를 시키면서, 여기저기 던져놓은 것들을 치우다, 창가에 있는 오렌지를 버리려고 보니, 오렌지가 썩지도 않고 이 염천 삼복까지 싱싱한 그대로다.

벌써 몇 개월인가?
석 달 열흘 백일이 지나고 4개월째인데, 단순한 과일이 냉장고도 아닌 실온에서, 그것도 날마다 뜨거운 불볕이 쏟아지고 있는 남쪽 창가에서, 여름 삼복인 지금까지 썩지 않고 있다는 것이, 과연 온전한 일인가?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 어느 절절한 러브스토리처럼, 지난 봄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지나간 미인을 생각하는 촌부의 간절한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면, 더없이 기쁘고 다행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전설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기적도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미 썩어도 몇 번을 썩고, 오래전에 썩어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할 오렌지 한 개가 썩지 않고 빛깔과 향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촌부는 썩지 않는 오렌지 한 개가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우리들이 좋다고 수입해서, 온 나라 국민들이 너도나도 즐겨 먹고 있는 이 오렌지에 무엇을 얼마나 처발랐기에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썩지 않고 있는가?

누구를 믿어야 하나?
무엇을 먹어야 하나?
부엌 남쪽 창가에서 썩지 않고 4개월을 보내고 있는 오렌지 한 개가 무섭고 두려운 무술년 삼복이다.


박혜범 섬진강 정신문화원장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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