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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모두 버린 독립투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 김낙훈 편집국장
  • 승인 2019.03.1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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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저널 편집국장 칼럼]= 일제 강점기에 의열단장, 민족혁명당 서기부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맡으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안위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온몸을 내던졌고,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 그 이름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이다.

 약산(若山)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 의백으로 활동하며 국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1920년대의 의열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분으로 크게 혼란을 겪을 때, 임정 대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약산은 1930년대에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이육사와 정율성 등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1938년에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항일운동을 통합하는 큰 축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도 맡았다.
 1940년대에 들어선 백범 김구와 합심해 우리 민족사 최초로 좌우합작도 이뤘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는 광복군 부사령관도 역임했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도 맡아 중국에서 마지막까지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는 약산이 활약한 공간이 없었다. 1947년 초 미 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득세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뺨을 맞는 등 치욕을 당했고,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몽양 여운형이 그해 여름 암살당하는 모습을 보며 해방된 조국에 크게 좌절했다.
 그리고 친일 경찰과 우익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약산은 신변의 위협마저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약산은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에 간다.
 여기에서 약산은 '자의반 타의 반으로'  귀환하지 않고 북에 남게 되었다.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1958년 김일성의 연안파 제거 때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다고 한다.
 숙청당한 약산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유일 체제'에 부담이 되었는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도 묻히지 못했다.

 한편 남쪽에서도 약산의 찬란한 독립운동의 활약상과 공적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사에 완전히 배제되는 불행을 당했다.
 이렇게 남북한이 공모라도 한 듯이 약산을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 버렸고, 약산은 남과 북의 역사에서 미아로 남는 치욕을 당하며 한편으로는 역사 왜곡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행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에 따라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약산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지 않고 있다.  
 보훈처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을 개정해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실제 약산의 고향인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는 약산 김원봉을 포함해 그의 평생 친구이자 동지였던 윤세주 열사 등 80여 명이며, 이중 약산을 제외한 79명이 2019년 2월 기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서훈을 받았다.
 그런데 약산 김원봉만이 유일하게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서 조금만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을 하면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첫째,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약산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줄 방식 중 하나로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뿐이다.

 1925년 약산은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였고, 중국 내 독립운동 당시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약산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의견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이역만리 타국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국 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면 좌우 이념을 넘나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한 명의 독립운동가였을 뿐이다.
 둘째, 약산이 북으로 간 것도 미 군정의 조정을 받은 친일 경찰과 우익 정치깡패의 신변 위협 때문이라는 사실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밝혀졌다.
 셋째, 북한에서의 고위직을 역임한 것도 김일성이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지 결코 그들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6.25 이후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과 대립하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되는 약산의 행적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넷째, 북한의 애국열사릉은 대한민국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데, 6.25 중에 납북됐다가 사망한 사람들인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류동열, 윤기섭, 오하영, 엄항섭, 최동오 등이 안장돼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개 중국에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우파 민족주의자들이다.
 북한이 이들을 예우하는 목적은 자기들이 항일 민족 운동의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북한의 이러한 의도에 맞서 우리 대한민국도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던 약산 김원봉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포용해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약산 김원봉의 서훈은 현행 기준으로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 국회 등 정치권에서 이를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남북이 모두 버린 독립투사인 약산 김원봉을 서훈한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항일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선점하는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북한 화해의 상징은 물론이고 남북이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에서

                

김낙훈 편집국장  a257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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