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6.18 화 16:24
상단여백
HOME 칼럼&사설 칼럼&사설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지킨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차일혁 경무관
  • 김낙훈 편집국장
  • 승인 2019.03.24 21:20
  • 댓글 0

[다산저널 편집국장 칼럼]="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

 이는 1951년 6.25 전쟁 중 공비 토벌이 한창인 전남 구례에서 빨치산의 근거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당시 한 경찰관의 항변이었다. - 그 경찰관은 지리산 공비 토벌의 영웅 '차일혁'이었다.

 차일혁 경무관은 지금 국보 67호로 남아 있는 각황전의 문짝을 뜯어내 불태우고는 "전각 문짝을 태운 것도 절을 태운 것이니 명령을 따른 것"이라며 기지를 발휘해 천년고찰 화엄사를 구했다.
 또한 그는 작전명령을 어기면서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도 지켜냈다.

 이렇게 차일혁 경무관은 지휘관으로서 작전의 본질을 잘 간파하며 슬기롭게 문화유산을 지켜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면서도 문화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그의 학식과 품성에 존경심을 느낀다.
 여하튼 전화(戰火)에서 천년고찰들을 구한 공로로 2008년 10월 정부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7월 7일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흥성공업전수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초 조선인 교사를 연행하던 일제 특별고등계 형사를 구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지강(芝江) 김성수와의 인연으로 중국 중앙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부터 조선의용대에서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치다가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김성수, 이규창 등과 함께 악명 높았던 일본 경찰 사이가(齊加), 츠보이(坪井) 등을 저격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앞장섰다.
 대부분의 조선의용대 출신이  좌익에 가담하거나 북한 인민군에 참여하였으나, 차일혁 경무관은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옹골연 유격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북한 인민군과 싸웠다.
 그리고 1950년 12월 10일 차일혁 경무관은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동지였던 최석용 전북지구 전투사령관의 권유에 따라 제18전투경찰 대대장을 시작으로 경찰에 투신하였다.

 그 후 차일혁 경무관은 지리산 일대 공비 토벌에서 뛰어난 전과(戰果)를 올렸고, 사람들은 그의 별호를 '지리산 호랑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특히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에선 75명의 병력으로 2000명의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하지만 차일혁 경무관은 용맹과 지략만 뛰어났던 게 아니었다고 한다.
 먼저 그가 화엄사 등 천년고찰을 구한 문화적 소양과 품성은 앞에서 이야기하였기에 더 이상은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다른 면을 볼까 한다.

 첫 번째로 차일혁 경무관은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단순 부역자는 모두 풀어줬고 끝까지 전향하지 않는 빨치산은 전쟁 포로로 대우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대원들에게는 일체의 보복 살인도 금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갱이라는 혐의만 있으면  죽이던 다른 지휘관과 달리, 붙잡힌 빨치산들을 뜨거운 민족애와 사상 교화로 귀순시켰고, 자신의 부하로 채용했다.
 이러한 그의 조치에 대해 군과 경찰 일각에선 이런 그를 온정 주의자라고 헐뜯기도 하고 좌익으로 의심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일혁 경무관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으로 1953년 9월 차일혁 경무관은 전투경찰대 제2연대 연대장으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여 사실상 토벌작전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현상을 사살한 차일혁 경무관은  인간적인 연민으로 이현상의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뼈를 자기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리고 적장의 장례를 치러 주는 대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한 차일혁 경무관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회식 때 일본 군가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훗날 그가 경찰서장을 할 때 회식 자리 등에서 차일혁 경무관의 이러한 성향을 아는 사람들이 절대 일본 군가나 노래를 절대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술자리에서 일본군 군가를 즐겨불렀다는 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또한 충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불우 청소년들을 모아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해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주경찰서장 당시 작전 성공으로 부대에 내려진 포상금은 불우 이웃에 전액 기부하였고 참호용으로 지급된 자재는 얼어 죽어가는 주민들의 주택 복구에 우선 지급했다. 이런 일화는 그의 됨됨이와 국민에 대한 애민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차일혁 경무관은 공주경찰서장 재직 중이던 1958년 8월 안타깝게도 38살의 젊은 나이에 금강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빨치산 토벌이라는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정신으로 충만한 지휘관이었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을, 적군에 대한 원한과 복수보다는 관용과 포용을,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아는 멋쟁이 휴머니스트였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 차일혁 경무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서
 

김낙훈 편집국장  webmaster@dasanjournal.co.kr

<저작권자 © 다산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