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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은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
  • 박혜범 섬진강정신문화원장(향토사학자)
  • 승인 2019.03.2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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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경술년(庚戌年)에 태어난 숙빈 최 씨(淑嬪 崔氏)의 후손들이(영조에서 순종까지) 조선의 왕통을 이어가다, 240년 후 4번째 경술년인 1910년, 무능과 부패로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돼버렸고, 사람은 자손을 낳지 못해 후사가 끊겨, 나라와 사람이 다 함께 망해버렸으니, 이를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전생과 금생을 넘나드는 윤회의 전설과는 달리, 이른바 혜철국사가 구례읍 섬진강변에 자리한 오산(鰲山) 정상 도선사(道詵寺 현 사성암)에서 제자인 도선국사에게 전하여 고려를 창업한 도참(圖讖)으로, 지리산 화엄사 장육전(丈六殿)을 각황전(覺皇殿 )으로 바꾼 뜻을 풀어보면, 숙종 25년(1699년) 계파대사가 중건한 각황전은 이 씨 조선이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은밀히 비보(裨補)하여 막으려는 비방(秘方)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로부터 개인이 집을 짓거나 묘를 쓰는 것은 물론 승려들이 절을 짓거나, 왕실에서 궁궐과 능을 조성하는 등등 중요 사업을 할 때는, 반드시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는 가장 합당한 터를 찾았고, 이와 함께 오래도록 번성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비밀하게 감추어 배설하고 은밀히 시행하는 것이 도참의 비법이라,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특히 국운과 왕조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부연하면, 이성계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조선은 도참서의 유포와 소장을 금지하고 불태웠으며, 연산군 당시 남해 사람이 구례에 와서 도참서를 보았다는 연유로 일족을 역모로 다스렸고, 구례현을 유곡부곡(楡谷部曲)으로 강등, 남원부 관할로 귀속시켜버린 사례는, 역설적으로 조선왕실이 도참을 사실로 믿고 중히 여기며 특별하게 관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1499년(연산군 5) 폐현, 1507년(중종 2) 석주관과 잔수진을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구례현으로 회복시켰다.)

이처럼 흩뿌린 겨자씨를 헤아리듯 난해하고 비밀한 도참의 이야기를 짧은 글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 제 19대 왕 숙종(肅宗1661∼1720)이 하사했다는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의 의미를 도참으로 풀어보면, 신령한 불보살의 힘을 빌려 멸망이 예측된 조선과 왕실을 비보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숙종 당시 은밀히 궁궐의 안팎에 신당(神堂)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저 유명한 장희빈의 기록은 저주와 액막이의 주술적 신앙이 민간에서 널리 횡행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화엄사를 중건한 각성(覺性)대사는 남한산성을 축성하였고, 오늘의 각황전을 중건한 제자인 성능(聖能)대사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는데, 각성대사와 제자인 성능대사로 이어지는 화엄사 승려들의 주도로 도성을 방비하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축성한 사실이다.

이는 당시 두 사람의 사제가 이른바 오산 도선사에서 혜철국사가 도선국사에게 전한 도참에 능통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조선왕실과 화엄사의 관계가 그만큼 돈독하였으며, 숙종은 계파대사의 도력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호를 계파(桂坡)라 하여, 계수나무 언덕 또는 달의 언덕으로 자처한 성능대사의 각황전과 원통전 중수는, 1703년 심어놓은 피보다 붉은 홍매 한 그루를 통해서, 인경왕후를 향한 대사의 애틋한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본래의 장육전을 각황전으로 이름을 바꾼 의미를 도참으로 풀어보면, 기울어가는 조선과 왕실을 비보하여 놓고, 천연두로 20세의 나이에 요절한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1661년~ 1680년)의 불심(佛心)을 전설로 만들어 비보를 감추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화엄사 각황전 전경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본래 각황(覺皇)은 석가모니를 칭하는 것으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실록을 보면 유림(儒林)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사대부들은 물론 왕실에서 사용한 전례가 없음에도, 숙종이 석가모니를 칭하는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임금을 깨우쳤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각황(覺皇)을 내리고, 화엄사가 천년의 역사이며 상징인 장육(丈六)의 이름을 버리고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특별하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능(聖能)대사가 황제를 깨우친다는 각황전(覺皇殿)을 짓고, 그 옆에 원통전을 지어 대자대비하신 원력으로 세상을 구하고 중생들을 구하는 관세음보살로 하여금, 각황전을 지키며 기원하고 있는 형국으로 비보(裨補)한 뜻을, 선사가 인경왕후를 위하여 심어놓은 붉은 홍매는, 숙종이 이름을 하사하고 계파대사가 받아들인 각황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라와 사람이 다 함께 망할 것을 알고, 끊임없이 어리석은 임금을 깨우쳐,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려는 각황전의 원력과는 달리, 끝내 나라와 사람이 다 함께 망해버린 것은,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비롯하는 일들은, 계파대사의 신통한 법력도 막지 못하고, 하늘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오늘, 2019년 3월 26일을 살고 있는 우리가,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누가 주인이 없는 공물인 청와대의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흥망이 달라지고 민생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처럼, 청와대의 터가 나쁘고 권력이 악한 것이 아니고, 청와대를 차지한 사람에게 달렸음을 알고, 때마다 오는 선거를 통하여, 좋은 사람을 청와대로 보내는 일들을 힘써 실천하는 일이다.

 

박혜범 섬진강정신문화원장(향토사학자)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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