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8.22 목 15:37
상단여백
HOME 문화 예술&연예
홍성모의 고향작품 시리즈, "고향이라는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청림리 노적
  • 홍성모 화백
  • 승인 2019.07.13 11:51
  • 댓글 0

어느 누구나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있기 마련이다.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 시간,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의 공간이라서 시간과 마음 중에서 비중이나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살았던 장소와 오래 살았다는 긴 시간과 잊히지 않는 정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고향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어느 고을 어떤 지점을 제시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살았다는 시간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사람마다 고향이 주는 이미지는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느낌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 같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 바로 고향 풍경 일 것이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땀내가 흥건히 베여있고, 발자취가 남아 있으며 아련한 추억들이 오롯이 남아있는 그런 풍경이기 때문이다.

내가 청림리 노적(露積) 마을을 그리게 된 사연이 그 이유다. 어느 날 내변산 사자동을 가기 위해 달리는데 아침 안개 자욱한 차창밖에 정말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 흡사한 분이 고추밭에서 일하시는 모습 가까이에서 필자도 모르게 '어머니' 하고 불렸다. 그 사이에 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햇살에 은행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워 가던 길 멈추고 스케치 한 작품이다.

상서면에 위치한 노적마을은 청림리에 속해있으며 원래 다섯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동, 청림, 노적, 거석, 서운리이다. 부안댐이 만들어지면서 서운마을은 수몰되어 마을이 사라졌다.

노적리는 내변산 중앙에 위치한 산골마을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다. 옛 이름은 노적매라고 불리었는데 노적마을의 노적은 나락(벼)을 산봉우리처럼 높이 쌓아 올린
노적가리 모양의 봉우리가 마을 앞에 있어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또한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조선 정조 때 파평윤 씨가 처음에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그 후손은 없고 비슷한 연대에 장흥 고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왼쪽에는 청림천, 오른쪽에는 거석천이 흘러 소(沼)를 이룬다. 두 냇물이 아우라지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말바위 아래 그 소를 양마입구(廐養馬入) 말 밥통으로 비유해 왔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전하나, 풍수지리상의 양마입구(良馬入廐), 즉 말이 들어오는 형국을 말하는 것으로 그 소 아래에 판마실(板馬室 : 마구간)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한다.

노적마을은 청림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청림 물이 노적 앞 냇가로 모이는데 물이 좋으므로 어느 집 어디를 가든지 물이 나오며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게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동네에 비해서 동네도 크고 살기도 좋아서인지 해방 후와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외부에서 사람들이 여럿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주변 산 밑 골짜기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골짜기는 위치에 따라 토질이 다르고 햇빛이 비치는 시간이나 방향도 달랐다. 그래도 노적마을은 산골치고는 햇빛이 오래도록 남아 일조량이 커서 논밭의 작물도 잘 자라는 편이었다. 마을 옆으로는 냇가가 있었다. 청림에서 내려온 물과 학치재 골짜기에서 거석을 거쳐 흐르는 물이 마을 앞에서 합쳐진 물골을 전통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고기도 잡고 여름이면 멱을 감기도 했다. 전통은 물이 깊어 멋모르고 놀던 아이들이 죽어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노적 사람들이 부안에 한번 나가려면 학치재를 넘어 개암사 주변을 싸고돌아 감교를 거쳐 우덕을 지나 부안으로 나갔다. 또 하나의 길은 청림 앞길로 해서 유동의 창수재 뒷산을 넘어 내동과 우덕으로 가는 옛길이다. 이렇게 비록 산골이지만 부안군에서는 유식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한 이들이 주변과 마을 앞 전답을 많이 차지했고 살만했다. 그렇다고 화려한 기와집은 아닌 초가집이었지만 집이 크고 기둥만큼은 실하고 반듯한 것으로 집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는 산골마을로서는 꽤 큰 50여 호가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동네가 반촌(班村)이다 보니 서당도 있었다. 노적봉 밑에는 지당골이라는 꽤 큰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유송열 선생이 서당을 차려 청림리의 젊은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도 어릴 적 보리 한말에 한 달 수업료를 지불하고 서당을 다닌 적이 있다.

동네분들 얘기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 변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과 군경들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맞기도 많이 했고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고 한다. 9·28 수복 후에는 변산으로 들어간 부안의 많은 좌익들이 있었고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이 치열하게 부딪힌 곳이라서 노적 마을 같은 경우는 이 다툼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피해도 당하거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견디면서 살아야 했다.

옛날에 노적마을에는 효죽(孝竹)거리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푸른색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영광을 표시하고 축하를 하였는데 이를 효죽(솟대)이라고 한다. 노적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때 많은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합격을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을 세웠던 그 길거리를 효죽거리 라고 했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신선대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신선들이 백금과 황금으로 된 바둑알로 금바둑을 두다가, 여덟 신선이 말을 타고 팔마실에 내려와 팔선주를 마시고 돌아갔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팔선주(八仙酒)는 신선이 마시는 술로, 예로부터 변산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 민속주로써 변산에 자생하는 4근(마가목, 말오줌대, 개오동, 오가피), 4본(석창포, 위령선, 삽주, 쇠무릎) 등 여덟 가지 약재로 빚은 술이다.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좋을 뿐 아니라 신경계통의 질환 예방과 건강증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술보다는 약용으로 더 많이 애음하여 온 귀한 술이다.
그 밖의 땅이름으로는 꾀꼬리봉, 매바위, 삼예봉, 양마입구, 코끼리바위, 농바위 등 이 있다.

 

홍성모 화백  webmaster@dasanjournal.co.kr

<저작권자 © 다산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