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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역사 이야기김득신(1604년 ~ 1684년)
  • 이상석
  • 승인 2019.09.3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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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金得臣)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 김 씨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
아버지 김치(金緻)는 동래부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의 생부는 김시회(金時晦)로 부평부사를 지냈는데 김시회의 이복 맏형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어려서 큰아버지 김시민의 양자가 되었다.
김득신의 어머니 사천 목씨(睦氏)는 이조 참판을 지낸 목첨(睦瞻)의 딸이다.
충청북도 증평에서 태어난 김득신은  1618년 14살 때 아버지 김치를 따라서  한양으로 올라왔다.

김득신의 외가 집은 명문가 집안으로 큰 외삼촌 목서흠은 예조참판을 지내고 둘째 외삼촌 목장흠은 호조참판을 지내고 셋째 외삼촌 목대흠은 강릉부사를 지낸 명문가 집안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아들 김득신이 태어나자 김득신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다가 아둔한 둔재가 되었는데 10살이 넘도록 글을 가르쳐도 별 진척이 없었다.
그런 김득신을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 김치는 계속해서 김득신에게 글을  반복해서 가르쳤다.

김득신이 글을 어느 정도 반복해서 읽었는지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김득신이 자주 읽는 웬만한 책은 모두 외울 정도로 보통 책 한 권을 수만 번은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마천이 쓴 백이열전(伯夷列傳 : 옛날 중국의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의 인품을 적은 책)은 1억 번이나  일어서 그가 후일 지은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수만 번 읽은 책은 노자의 사상을 적은 노자전, 蘇洵(소순)이 쓴 목가산기(木假山記), 소식(蘇軾)이 지은 제구양문(祭歐陽文), 벽력금(霹靂琴), 백리해장(百里奚章) 등등 36책은 수만 번이나 읽었다.
그 외에도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또 중용과 대학 등 많은 책은 수천 번 이상을 읽고 수백 번 읽은 책은 그 수를 헤아리지도 못한다.

주위에 사람들은 아버지 김치에게 저런 둔재에게는 아무리 글을 가르쳐도 안된다고 하여도 김치는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한데도 글 읽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것이 대견스럽다."라고 했다.

김득신은 반듯한 성품과 곧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 경산현령 구장원과 헤어지면서 몇 년 후 某월 某일에 구장원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만나기로 한 날 며칠을 앞두고부터 비바람이 몰아치는 굿은 날씨가 계속되자 구장원은 이 비바람에 김득신은 오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약속한 그날 김득신은 비바람을 맞으면서 구장원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일화는 안동 부사와 남원 부사를 지낸 친구 홍석기가 관직에 나가기 전인 젊은 시절에 김득신은 홍석기의 집에 머물면서 함께 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홍석기가 출타를 하고 없는데 홍석기의 머슴이 솥을 들고 들어오자 김득신이 의아해서 머슴에게 웬 솥이냐고 물어보자 빚 받을 집에서 돈을 주지 않아서 뽑아왔다고 하자 김득신은 자신의 공부하던 책과 짐을 싸서 상종 못할 사람이라고 집으로 돌아갔다.
홍석기는 김득신이 돌아가고 나서 하인에게 내막을 물어보자 홍석기의  누이가 과부가 되고 홍석기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지니고 있던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돈을 갑지 않자 하인이 솥을 들고 온 것으로 홍석기는 김득신에게 잘못했다고 간곡히 사과를 하였다.

1623년 아버지 김치가 경상도관찰사를 지낼 때 안동지역을 순찰하다 객사하자 김득신은 1626년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치고는 외할아버지 목첨과 외삼촌 목서흠을 따라다니면서 계속해서 글을 읽었다.

30살이 다 된 어느 날 볼일이 있어서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이웃 동내를 지나가는데 어느 집 앞에서 선비가 책을 읽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말을 멈추고는 한참을 듣던 김득신은 이 글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글인데 도통 뭇은 글인지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라고 하자 말 꼴이를 잡고 가던 하인이 답답한 듯 선비가 읽고 있던 문구를 따라 외우면서 말하기를 나리께서 수만 번도 더 읽어서 쇤네도 외우는 백이열전 아닙니까?" 라고 하자 그때야 김득신은 자신이 십만 번도 더 읽은 백이열전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면서 말에서 내려서 하인이 쥐고 있던 말꼴이를 잡으면서 "네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내 말을 타고 다녀라" 라고 말을 하였다.

김득신이 어느 날 양반 자제들과 압구정에서 시를 읊으면서 노는데 하루 종일 시구절을 생각하도 시구절이 생각이 나질 않는데 저녁 무렵에 모임이 끝날 때 큰 소리로 ''내가 오늘 훌륭한 시 두 구절을 지었다네" 라고 하면서 친구들 앞에서 시 두 구절을 읊는데 "삼산은 청천 밖으로 반쯤 걸려있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둘로 나뉘었네" 라는 이백의 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를 읊자 듣고 있던 친구들이 "이 사람아 그 시는 이백의 시 아닌가" 라고 하자 김득신은 "천년 전 적선(謫仙 : 이백을 높여 부르던  말)이 나보다 먼저 시를 얻었으니 나는 석양에 붓 던지고 누각에서 내려간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정자에서 내려오자 함께 있던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김득신은 음보(蔭補)로 참봉을 제수 받고  관직 생활을 하다가 1642년 39살 때 사마시 3등 51위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후에 사직하고 충청도 청주의 도정골에 있는 도정당(桃汀堂)으로 거처를 옮기고 글 읽기를 계속하였다.
166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678년 74세 때 사도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을 지내고 1680년 통정대부를 거쳐서 1682년 가선대부를 제수 받고 안풍군(安豊君)에 봉해졌다.

1684년 81살 때 충청도 괴산군을 지나가던 중에 재물을 노리던 화적들에게 피살되었다.
김득신이 화적들에게 피살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숙종은 참혹함을 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종2품 당상관을 증직하고 살해한 화적을 잡으라고 토포사(討捕使 : 도적, 산적, 화적 등을 체포하기 위해서 특별히 임명한 관리)를 임명하고 화적들을 잡으라고 괴산으로 내려보냈다.

김득신은 자신의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나는 결국 이름을 남겼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다."

 


이상석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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