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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가문이야기김녕 김씨(金寧 金氏)
  • 이상석
  • 승인 2019.10.2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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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김 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주 김 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 경순왕 김부(金傅)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9세손으로 김알지의 36세손이 된다.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출생한 김시흥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김녕군(金寧君 : 김해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김시흥은 여러 관직을 거쳐서 광록대부와 평장사를 지내고 1174년 조위총의 난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해서 일으킨 난)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자 명종은 김시흥을 금주군(金州君 : 김해의 옛 지명)으로 봉하고 문렬(文烈)의 시효를 내리고 식읍 1천호를 하사하였다.

그 후 후손들은 김시흥을 시조로 모시고 경주 김 씨에서 분적(分籍)하고 본관을 김녕으로 하고 계대해 오고 있다가 1413년 조선 태종 때 김녕의 지명이 김해로 개편되자 본관을 김해(金海)로 고쳤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 육군 제2군 사령관 가등청의 휘하 부장으로 조선에 귀화 한 항왜인 김충선과 함께 귀화 한 왜군 500여 명을 선조 임금은 김해 김 씨를  하사하자 김해 김 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 김시흥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 김충선과 항왜인들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 등 3가문이 혼존하게 되었다.
그러자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는 항왜 김 씨와 구분을 짖기 위해서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를 선김(先金)으로 하고 항왜인을 시조로 하는 김 씨를 후김(後金)으로 구분을 지었다.

그런데 김시흥을 시조로 하는 후손들이 다른 김해 김 씨와 구분을 하는데 어려움을 격자 1865년 김시흥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 종친회는 관향을 김해의 옛 지명인 김녕으로 고치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은 고려 때 안렴사와 형부시랑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고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자 후일 조선 태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며 이부상서로 증직하였다.

김중원의 손자 김광저(金光儲)는 공양왕 때 판도판서를 지냈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할아버지 김중원이 단식으로 순절하자 무록산(武鹿山)으로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키자 태조 이성계는 사람을 보내서 벼슬을 내리고 회유했으나 끝내 거절하다가 순절하자 후일 조선 태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며 이조판서로 증직하였다.

김광저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북도 옥천군 백지리로 낙향하고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다.

김질(金秩)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하고 예조판서를 제수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충청남도 아산으로 낙향을 하고 도고산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김관(金觀)은 조선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그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 1426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내외직의 여러 관직을 지내고 1456년 공조판서를 지낼 때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형(陵遲處斬 :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주기 위한 형벌로 살아있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형틀에 묵고 몸에서 가장 먼 발가락과 손가락부터 칼로 살을 3Cm 간격으로 저며서 고통을 주다가 살을 다 발라내면 뼈마디를 자르고 그러다가 죽으면 머리를 잘라서 효수하는 가장 무서운 형벌)을 당했고 사사되었다.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은  양지현감과 거창현감을 지내고 영월군수를 지낼 때 아버지 김문기가 사사되자 아버지를 따라서 자결을 하였다.

1691년 숙종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등 6명을 복관시킬 때 김문기는 누락되었다.
그 후 1731년 영조는 누락된 김문기를 복관시키고 1757년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김문기가 사사되고 335년이 지난 1791년 정조는 김문기(金文起), 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등 3명을 삼중신(三重臣)의 칭호를 내리고 단종복위운동 때 억울하게 희생된 264명을 영월 장릉의 장판옥에 배식할 때 함께 배식하였다.

▲김문기 가묘

김문기는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977년 7월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死六臣) 문제를 다시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기로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를 설치하고 혼령을 모셨다.
김복룡(金福龍)은 공조판서를 지내고 김복룡의 아들 김응수(金應壽)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호성공신 3등에 녹훈되고 사후에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지고 한성판윤에 증직 되었다가 다시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되었다.

김유부(金有富)은 늙은 노모를 왜군이 득실거리는 집에 둘 수 없다고 등에 업고 아들 김기남(金起南)과 함께 영천 팔공산 전투에 참석하였다.

김녕 김 씨 현대 인물은 김법린(金法麟)은 문교부장관과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김석수(金碩洙)는 대한민국 제34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김재규(金載圭)는 제8대 중앙정보부 부장과 제13대 건설부 장관을 지내고 1979년 10월 26일 밤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정변을 일으켰고 김영삼(金永三)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냈다.

김녕 김 씨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문과 2명, 무과 5명, 생원진사시 12명 등 모두 19명을 배출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김녕 김 씨는 513,0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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