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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 권영심 작가
  • 승인 2019.11.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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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자들이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지금 시대의 엄마들은 여러모로 예전의 모성과는 다른,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엄마가 되고 자식에게 바라고 주고자 하는 것도 남다르다.

그러나 예전의 엄마들...
지금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은 엄마라는 단어에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엄마들이 죽음보다 더한 고난 속에서 자식들을 지키고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 자식들 중에서도 아들의 존재는 엄마라는 여인을 찢는 칼이거나 찌르는 창 같은 존재였다.
아들이 입신양명할 수만 있다면 엄마는 자신을 찢고 온몸이 갈라져도 무엇이든 했다.
그 시대의 엄마들은 그리했다.
출세한 아들의 고임을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것이 엄마 된 이의 타고난 소임이라고 믿고 단 한 조각의 의심도 없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 엄마가 아흔이 넘어 지금 살아 있다면 칠 십을 지나는 아들들은 거의 효도를 한다.
옆에 있어주고 씻겨 주며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손을 잡고 길을 함께 걷는다.
아주 예전의 아이였던 자신에게 엄마가 했듯이 그렇게 아들은 엄마에게 되돌려 준다.
그것이 사람의 효의 원형이다.

우리의 지금 시대는 그 모든 효의 원형을 잃어가면서  수족이 불편하고 정신이 희미해지는 부모는 요양원으로 보내져서 직업적인 사람들이 자식을 대신한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현실이고 이제는 당연한 수순으로 아무도 부모와 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의 주위에 그런 효의 원형이 남아 있어 사람됨을 뒤돌아보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엄마가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나 일흔의 자식과 아흔의 엄마는 그 어떤 모습이어도 가슴 저리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글로 소개한 지인 오라범의 아흔일곱 되신 어머니가 기어이 탈이 났다.
순조롭게 회복되는가 했더니 휠체어를 타고 가다 넘어진 뒤로 자리보전하고 누워 기저귀에 용변을 받아낼 지경에 이르렀다.
그토록 맑던 정신도 흐려지고  치매의 전조증상조차 보이고 있다.
노인의 건강은 검불과 같아 하루 볕을 모른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아들은 형제도 없는 혼자여서 그 수발을 맡아서 하며 얼굴이 대추처럼 쪼그라들고 있다.
집 주변 근처에서 떠나지 않으며 어머니의 호출을 놓치지 않고 뛰어가는 모습이 기막혀서 가슴이 묵직하다.

오늘 일이 있어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첫 숟갈을 들기도 전에 호출이 울렸다.
오라범은 지체 없이 뛰어나가더니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이십여 분 후에 그는 돌아왔고 우리는 그 효심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요즘 어느 아들이 병석에 누운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뛰어가겠는가?
오라범은 많이 먹지 못했고 소주를 두어 잔 했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손길을 극도로 싫어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 결벽함이 안타까웠지만 방법이 없는 현실이었다.
항상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아들이지만 오늘 유독 오라범은 옛일화를 두서없이 말하며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그중 하나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보석인 양 빛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에 합격해서 공부할 때 그 학비를 대기 위해 어머니는 남의 집 식모를 살았고, 그 부잣집에서 흔전만전 널린 음식들을 볼 때마다 아들을 생각해 목이 메었다.
어느 날인가... 주인집엔 잔치가 열렸고 어머니는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종이에 싸서 몸 안에 감추고 나오려다가 들켰다.

어머니는 모진 욕설을 듣고 쫓겨났고 그것을 모르는 아들은 뒤에 그 집에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주인집의  딸에게 듣게 되었단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켜서 쫓겨났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온 뒤 아들은 밤잠을 잃고 공부를 해서 기어이 장학금을 따냈고 그 증서를 받아 든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는 이야기...

우리는 붉어진 얼굴을 눈물로 적시는 오라범과 함께 조금 울었다.
그의 효심은 그렇게 깊은 아픔으로 길러진 열매이니 어찌 아흔일곱 노모의 병환이 뼈에 시리지 않으랴?
두어 해만 더 살아 계셔주기를 소원하는 칠순 아들의 마음은 노모에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서도 안전한 왕국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인연을 지어 부모 자식 되어 이 세상에 몸 받아 태어나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부모 자식들의 경우를 엿보게 되면 축복보다 저주인 경우가 더 많고 무자식이 상팔자란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 엄마 내 아들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지금 있다는 것은 축복이어야 한다.
칠순 아들이 아흔 엄마의 일신을 돌보며 힘든 나날을 보낼지라도 지금 옆에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그 마음을 귀하게 배운다.

어떤 엄마라도 그 몸에 열 달 품어 세상에 내놓았고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키웠다.
내 입에 좋은 것 넣지 않고 자식의 그 작은 입안에 모두 주면서 자라남을 환희로 알았다.
낳으시고 기르셨으니 그 은혜 크고도 넓어 가늠할 길이 없다.
아들이 엄마를, 딸이 아버지를 보살피고 보듬어주며 그 마지막을 여미어 주는 고귀한 모습은 어쩌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 만물에겐 그 존재만이 지켜야 하고 이루어내야 하는 고결한 목표가 있다.
진부하고 오래된 단어가 오늘 우리에게 먼 빛으로 다가오니 바로 -효 -이다. 


권영심 작가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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