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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가 아니라 분열이 필요한 세상
  • 한설 예비역 준장. 순천대 초빙교수
  • 승인 2019.12.2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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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아침이다. 어릴 때 성당에 다닐 때 들었던 말 중에서 유독 ‘일치’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너와 내가 하나 되고 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 참 좋다고 느꼈다. 일치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인 듯하다.

인간이란 원래 분열하려는 속성을 가지려고 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단 한 번도 인간은 일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인간은 하느님을 본떠서 만든 불안전한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선과 악의 교배로 만들어진 존재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조로아스터적 관점이 인간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유용한 것 같다. 수천 년 동안 정의로운 세계를 원했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절반을 구성하는 것이 악이기 때문이다.

선은 분명하다. 그러나 악은 분명하지 않고 교묘하다. 중국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은 그 귀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정체가 드러난 귀신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지 못한다. 이름을 부르면 귀신이 도망 간다는 설정은 천주교의 퇴마의식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간혹 엑소시스트 계열의 영화를 보면 퇴마 신부가 마귀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묻는 장면을 간혹 볼 때가 있다.

악과 마귀는 경계선이 분명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어렵다. 복잡하고 분명하지 않은 혼돈 속에서 악은 존재한다. 악을 몰아내는 방법은 악이 무엇인가를 밝혀 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을 분명하게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내야 할 인간 그 자체가 선과 악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선이 도처에 존재하듯 악도 도처에 존재한다.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고 혼돈스러운 곳에는 악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그 경계에 서고자 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경계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지구인 중에서 어린 소녀인 툰베리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경계에 서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경계에 서려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것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유보적인 태도로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말이다.

지루하게 선악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혼동스럽게 만드는 것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특히 진영논리가 도덕적 가치를 전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제까지 도덕적 가치를 논하면서 진영논리의 영향을 받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문제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 문제였다. 최소한 거짓말을 하지 말고 훔치는 것은 진영과 상관없이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 진영적 논리란 진영의 이익이란 말과 동일하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하는 도덕적 원칙과 기준을 마음대로 옮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닐까?

인간이란 속성상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치를 추구하려면 그 기준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기준이 흐릿해지면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그 희미함을 노리는 것이 바로 악이다. 도덕적 기준과 가치를 진영적 이익으로 무너뜨리려고 시도한 것은 소위 지금의 문빠로 불리는 세력들이었다. 소위 86세력으로 불리는 기득권자들이었다. 둑이 무너지면 물이 들어온다. 한번 기준이 무너지니 86세대뿐만 아니라 그 반대세력들도 마구 난동을 부린다.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 모호함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다.

일치는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아니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시가 애당초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일치를 이루자는 이야기는 선이 아니라 악의 주장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감하게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화합이 아니라 불화를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안다. 선과 악은 일치하기 어렵다. 선과 악이 일치하려는 노력은 모호함의 영역만 더 확대시킬 뿐이다.

그런 모호함 속에서는 선보다 악이 더 판친다.

 

한설 예비역 준장. 순천대 초빙교수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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